권석준 교수의 대담을 원문 흐름에 맞춰, 영상 대본 특유의 끊김과 반복을 걷어내고 잡지 인터뷰처럼 자연스럽게 다시 편집한 버전입니다. 타임스탬프는 제거했고, 질문과 답변이 글로 읽히도록 문장과 문단을 재구성했습니다.
대담은 미·중 정상회담에서 나온 엔비디아 H200 이슈로 시작한다. 핵심은 중국이 단순히 자존심을 부린 게 아니라는 점이다.
미·중 정상회담에 젠슨 황도 급하게 합류했습니다. 그래서 시장은 중국에 엔비디아 GPU 수출이 풀리는 것 아니냐고 봤죠. 그런데 정작 회담 이후에는 별 얘기가 없었습니다. 이건 중국이 더 이상 엔비디아 GPU가 필요 없다는 뜻일까요?
이번 정상회담은 짧았지만, 밀도는 꽤 높았습니다. 일론 머스크, 팀 쿡 같은 비즈니스 리더들이 경제사절단 형태로 동행했고, 젠슨 황은 원래 명단에 없었다가 급하게 포함된 것으로 보입니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엔비디아 GPU 수출 허용을 협상 카드로 쓰고 싶었을 겁니다. 그동안 미국이 중국에 고성능 GPU 수출을 통제해왔으니, “내가 H200을 풀어주면 중국이 좋아하겠지. 그러면 미국도 뭔가 얻어낼 수 있겠지”라는 계산이 있었겠죠.
그런데 귀국길 에어포스원 안에서 트럼프가 한 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H200을 열어주겠다고 했는데, 그들은 별로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것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건 중국이 감정적으로 “우린 필요 없어”라고 한 게 아닙니다. “주면 받을 수는 있지만, 굳이 그걸 중심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 것을 만들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습니다.
젠슨 황이 중국 수출 통제 완화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단순 매출 방어가 아니라, 중국이 아예 엔비디아 밖에서 새 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는 공포였다.
젠슨 황은 예전부터 “중국이 엔비디아 GPU를 계속 써야 독자 개발을 못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안 지나서 벌써 중국이 자체 생태계로 가는 모습이 보이는 건가요?
전조는 있었습니다. 올해 초 미국이 일부 엔비디아 GPU의 대중 수출 통제를 완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중국이 대량으로 수입했다는 신호는 거의 없었습니다. 심지어 한 장도 제대로 안 들어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죠.
저는 젠슨 황이 초조함을 먼저 보였다는 점이 오히려 엔비디아의 약점을 보여준 장면이라고 봅니다. 그는 단순히 중국 매출을 잃을까 봐 걱정한 게 아닙니다.
진짜 걱정은 중국이 반강제로라도 엔비디아, AMD 같은 미국 고성능 GPU를 못 쓰는 상황이 계속되면, 결국 자체 GPU든 CPU든 NPU든 만들어낼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게 단순 가성비 제품을 넘어 중국 공산당과 정부의 정책 지원을 등에 업고 중국 내부의 표준이 되어버리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중국 데이터센터, AI 모델, 산업용 컴퓨팅이 중국산 칩을 기준으로 설계되기 시작하면, 나중에 엔비디아 칩이 다시 들어와도 굳이 대량으로 살 이유가 줄어듭니다. 이건 중국 매출을 잃는 수준이 아니라, 시장 자체가 디커플링되는 문제입니다.
중국이 GPU를 못 사면 자체 GPU를 키우듯, HBM을 못 사면 중국판 메모리 생태계를 키울 수밖에 없다. 권 교수는 이 지점을 한국 메모리의 장기 리스크로 본다.
우리는 HBM을 중국에 팔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메모리도 한국산이니까요. 그런데 중국이 AI칩에서 자체 생태계로 간다면, 한국 메모리도 고점에 가까운 리스크가 있는 걸까요?
비슷한 메커니즘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중국도 메모리 병목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판 GPU와 CPU가 있다고 해도 결국 AI 연산에서는 메모리가 병목이 됩니다.
지금은 HBM이 부족하니 고성능 GDDR 같은 것으로 버티는 방식도 썼겠지만, DRAM 영역에서 한국 메모리 양사와 중국 업체 간 기술 격차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HBM과 고성능 메모리 수급이 계속 막히면 중국은 메모리도 중국판으로 키울 수밖에 없습니다.
GPU를 따라잡는 것은 어렵지만, 메모리는 양산의 논리가 더 강하게 작동하는 산업입니다. 규모의 경제와 학습곡선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시간은 중국 편이 될 수 있습니다.
CXMT든 YMTC든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고, 중국 내수 시장이 보장됩니다. 실패를 많이 겪더라도 계속 시도할 수 있고, 괜찮은 레퍼런스가 나오면 다음 세대에서는 시행착오가 줄어듭니다. 저는 이 학습곡선 효과가 메모리에서 발현될 수 있다는 점이 진짜 걱정됩니다.
DRAM이나 NAND는 범용 원자재처럼 쓰이는 제품인데, 중국 시장이 분리되면 한국 메모리 업체들이 팔 수 있는 시장 자체가 줄어드는 것 아닌가요?
아직 미국과 중국 사이에 시장이 완전히 분리된다는 명확한 시그널은 없습니다. 양국 모두 완전한 디커플링은 원하지 않을 겁니다. 서로에게 루즈루즈 게임이니까요.
그런데 원하든 원치 않든 조금씩 디커플링이 진행되다가 어느 변곡점을 넘으면 되돌리기가 어려워집니다. 중국식 GPU, 중국식 메모리, 중국식 CPU가 표준이 되면 굳이 국제 표준을 준수하지 않고 중국판 표준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렇게 분기되면 나중에는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는 일이 생깁니다.
중요한 건 중국이 이걸 중국 시장 안에서만 쓸 것이냐, 아니면 내수에서 체력을 기른 뒤 글로벌 시장으로 밀고 나올 것이냐입니다. 전기차가 그랬습니다. 처음엔 중국식 전기차로 시작했지만, 내수에서 규모의 경제와 학습곡선을 탄 뒤 글로벌 시장으로 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반도체도 같은 논리를 따라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국 반도체의 가장 큰 약점은 여전히 리소그래피, 특히 EUV다. 다만 진도가 0점에서 12~15점으로 올라온 속도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게 권 교수의 시각이다.
전기차나 디스플레이와 달리 반도체는 다르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장비, 소재, EDA, IP 라이선스 같은 독점적 병목이 워낙 크니까요. 특히 EUV나 포토레지스트가 없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중국 입장에서 가장 아픈 지점은 여전히 리소그래피 장비입니다. 특히 10나노 이하 선단공정에서 패턴을 구현하는 전공정 장비가 가장 뼈아픈 아킬레스건입니다.
제가 예전에 『반도체 삼국지』를 쓸 때만 해도 중국이 EUV 기술을 개발한다는 명확한 시그널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책을 쓰면서 중국이 리소그래피 기술을 어디까지 자급했는지 들여다봤고, 제 나름대로 점수를 매겨보면 100점 만점에 12~15점 정도까지 왔다고 봅니다.
물론 12점, 15점이면 아직 낮습니다. 하지만 거의 0점에 가까웠던 상태에서 불과 4년 만에 두 자릿수 점수까지 왔다는 건 꽤 관목할 만한 성장세입니다.
대담에서 가장 흥미로운 기술 파트다. 중국은 ASML식 EUV 광원을 그대로 복제하기보다, 과거 ASML이 경제성 부족으로 폐기한 방식을 다시 살리는 쪽으로 움직였다.
중국이 EUV에서 실제로 뭘 해낸 겁니까? 단순히 흉내만 낸 건가요, 아니면 의미 있는 단계까지 온 건가요?
EUV 장비를 뜯어보면 기본적으로 거대한 레이저 장치입니다. 강력한 CO2 레이저를 아주 작은 주석 방울에 쏘면, 주석이 플라즈마가 되고, 그 플라즈마가 식으면서 극자외선 대역의 빛을 냅니다. 이 빛을 골라 웨이퍼에 유도하는 방식입니다.
중국은 강력한 CO2 레이저는 어느 정도 흉내 내는 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주석 방울에 레이저를 쏘는 방식은 특허 보호가 강하니 우회합니다. 주석 방울 대신 주석으로 코팅된 두 판을 빠르게 돌려 마찰시키고, 그 과정에서 나오는 빛을 모아 웨이퍼에 유도하는 방식을 쓴 겁니다.
효율은 낮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빛을 만드는 상황까지 왔다는 점입니다. 더 흥미로운 건 이 방식이 ASML이 15~20년 전에 시도했다가 경제성이 안 나와 폐기한 기술이라는 점입니다. 중국은 속된 말로 쓰레기장을 뒤진 셈입니다. 그런데 그걸 말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ASML이 포기했던 방식보다 에너지 효율도 7~8배 정도 개선했습니다. 물론 지금 ASML이 쓰는 방식보다 낮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된다”는 것을 보였고, 개선까지 해냈습니다.
권 교수는 화웨이가 양산 팹은 없어도, 장비와 소재를 검증하는 테스트 팹 생태계를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게 중국 소부장 기업의 학습속도를 크게 올린다.
중국 반도체 정보는 외부에서 알기 어렵습니다. 교수님은 이 책을 쓰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취재하셨나요?
중국을 직접 많이 다녀왔고, 중국어로만 출판되는 기술 문서와 특허 문서를 최대한 구해 번역해 봤습니다. 특히 중국 내 특허 문서를 보면 2019~2020년 이후 리소그래피 관련 특허 수가 많이 늘어납니다. 그 시기가 EUV 리소그래피 수출 제한이 본격적으로 효과를 내기 시작한 때와 겹칩니다.
처음엔 중국 정부가 모든 배경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정부 과제 지원이 큰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부터는 화웨이 같은 중국 대표 IT 기업들의 민간 R&D도 굉장히 강해졌습니다.
화웨이는 자체 양산 팹은 없지만, 팹을 가진 것처럼 생태계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섀도우 팹, 즉 그림자 팹이라고 부릅니다. 양산용 팹이 아니라 테스트용 팹입니다. 웨이퍼를 생산하기 위한 R&D 팹이라기보다, 공정 장비와 소재가 실제로 퀄리파이되는지 검증하는 팹에 가깝습니다.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한가요?
중국 장비업체가 리소그래피 장비를 만들었다고 해봅시다. 화웨이는 테스트 팹을 열어주고 실제 데이터를 쌓게 합니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장비업체와 공유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스펙으로 장비를 만들어라. 언제까지 만들어라. 돈이 필요하면 주겠다”는 식입니다.
소부장 업체 입장에서는 트랙레코드가 가장 중요합니다. 한국 소부장 업체들은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공급망에 들어가기 위해 막대한 개발 비용을 쓰고도 트랙레코드 하나 얻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화웨이가 테스트 환경과 데이터를 열어줍니다. 돈 주고도 사기 어려운 데이터를 제공하는 겁니다.
중국 전역의 연구중심 대학에도 똑같은 과제를 동시 경쟁시킵니다. 가장 먼저 데이터를 얻는 팀에 돈을 더 몰아주고, 화웨이 장비나 팹 접근권을 줍니다. 정부 과제와 대형 민간기업의 미션 지향 R&D가 결합되면서 원래 20년 걸릴 일을 10년 이하로 줄이는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중국 반도체 투자는 자본주의 논리로 보면 말이 안 되는 프로젝트가 많다. 하지만 배터리, 전기차, 디스플레이에서 이미 그 비효율이 산업 경쟁력으로 전환된 경험이 있다.
결국 정부나 민간기업이 돈을 계속 넣어주니까 가능한 것 아닌가요? 자본주의 기준으로 보면 너무 비효율적인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중국 반도체 산업을 비판하는 지점도 그겁니다. 돈 낭비를 너무 많이 합니다. 자본주의 논리에서는 말이 안 되는 프로젝트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팹의 수율이 30%밖에 안 된다고 해봅시다. 100개를 만들면 70개는 버려야 합니다. 수율이 낮으면 평균 원가는 높아집니다. 후발주자인데 가격까지 높으면 누가 사겠습니까? 정상적인 주주자본주의라면 프로젝트를 접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이 논리가 잘 통하지 않습니다. 중국에는 5개년 경제계획이 있고, 국가 자원뿐 아니라 민간 자원까지 필요하면 동원합니다. 어떤 프로젝트는 죽이고, 어떤 프로젝트는 살립니다. 잘 나가면 좋은 성과를 얻지만, 잘못되면 막대한 비용 낭비가 생깁니다. 그런데 책임 구조는 약합니다.
중요한 건 중국이 이런 방식이 제조업에서 통한다는 경험치를 쌓았다는 점입니다. 배터리, 전기차, 디스플레이에서 그랬습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디스플레이도 됐고, 배터리도 됐고, 전기차도 됐는데 왜 반도체는 안 되느냐”고 보는 겁니다.
중국이 빠르게 쫓아와도 ASML이나 한국 기업들이 더 빨리 도망가면 된다. 문제는 선두의 기술 상방도 점점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는 점이다.
후발주자가 빠르게 따라오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ASML 같은 선두 기업이 더 빨리 발전하면 격차는 다시 벌어질 수 있지 않나요?
상방과 하방으로 나눠봐야 합니다. 하방은 중국이 빠르게 쫓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방이 고민입니다.
ASML의 EUV 장비는 세대로 보면 2세대까지 왔습니다. 1세대는 NA 0.33, 2세대는 High-NA 0.55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3세대는 0.75나 0.77까지 갈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이야기를 잘 안 합니다.
NA값이 높아지면 더 작은 패턴을 만들 수 있지만, 초점이 맺히는 깊이가 얕아집니다. 그렇게 되면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포토레지스트 두께도 더 얇아져야 합니다. 문제는 포토레지스트가 너무 얇아지면 패턴이 칼같이 잘리는 게 아니라 가장자리가 우글쭈글해진다는 겁니다.
피처 사이즈가 3~4나노까지 가면 원자 개수로 10~15개 수준입니다. 가장자리의 원자 몇 개가 전체 성능과 오류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예전에는 슬쩍 처리할 수 있었던 문제가 이제는 중차대한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상방은 점점 느려지고 있습니다. EUV 이후를 대체할 후보 기술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양산 레벨에서 명확하게 경쟁력이 증명된 것은 아직 없습니다.
그럼 중국이 ASML을 따라잡았다고 선언하는 순간이 올까요?
제가 중국 업체라면 단순히 “ASML 기술을 따라잡았습니다”라고 끝내지 않을 겁니다. 히든카드를 꺼낼 겁니다. “너희가 ASML 로드맵 상방에서 막혀 있는 동안 우리는 완전히 우회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고 하겠죠.
예를 들어 책에서 언급한 것 중 하나가 가속기 기반 EUV입니다. 지금은 상업적으로 말이 안 되는 기술처럼 보입니다. 축구장만 한 가속기를 만들어 전자를 가속·감속시키고, 거기서 EUV 대역의 빛을 얻는 방식입니다. 너무 크고 비효율적입니다.
하지만 중국은 이런 비상식적으로 보이는 길에도 대규모 투자를 합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면 특허 장벽도 약합니다. 성공하면 기존 ASML 로드맵을 우회할 수 있습니다.
중국이 계속 돈을 넣을 수 있느냐는 별도 문제다. 권 교수는 중국 경제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두 가지 시각을 제시한다.
결국 돈 문제 아닌가요? 중국이 무한정 돈을 찍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개발도상국 성격도 남아 있습니다. 이런 투자가 계속 가능할까요?
중국 경제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는 미국 싱크탱크 안에서도 이견이 있습니다. 주류 시각 중 하나는 중국이 예전처럼 두 자릿수 성장을 하던 시대를 졸업했고, 중진국 함정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장률이 3~4%로 내려오면 과거처럼 미래의 부를 당겨오는 방식이 훨씬 부담스러워집니다.
중국이 지금의 고비용 구조를 버티기 위해서는 미래의 성장을 담보로 돈을 당겨와야 합니다. 성장률이 5~6%라면 10년치 미래 수익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성장률이 2~3%가 되면 20년치 미래 수익을 당겨와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게 안 먹히면 큰 드로우백이 생깁니다.
반대로 다른 시각도 있습니다. 중국은 아직 완전히 개발된 나라가 아니고, 내수 인프라와 소비시장이 더 커질 여지가 있다는 겁니다. 1차, 2차, 3차, 4차 산업이 순차적으로 이동하는 게 아니라, 거대한 언덕처럼 동시에 커지는 구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걱정할 지점은 있습니다. 중국이 내수에서 충분히 얻을 게 없다고 판단하면,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글로벌 시장을 노릴 수 있습니다. 예전처럼 저가 시장만 노리는 게 아니라 저가, 중가, 고가를 동시다발적으로 공략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권 교수의 메시지는 공포론이 아니다. 한국에는 아직 시간이 있다. 다만 그 시간이 생각보다 짧고, 닫히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경고다.
중국을 알아야 하는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리소그래피 장비를 만들 것도 아니고, 결국 잘하는 건 메모리입니다. 한국 반도체 생태계에는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으셨나요?
이 책은 중국 반도체 산업을 다루지만, 동시에 한국 반도체를 비춰보는 거울로도 썼습니다. 제가 한국 반도체 산업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아직 골든타임은 남아 있습니다. 아직 타임 윈도우는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 윈도우가 생각보다 넓지 않고, 닫히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애초부터 국내 시장을 타깃으로 한 적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20~25년 동안 우리가 말한 글로벌 시장은 자연스럽게 중국 시장을 포함한 글로벌 시장이었습니다.
앞으로는 중국 시장이 분리될 가능성도 준비해야 합니다. 만약 시장 사이즈가 작아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고수익, 고부가, 고급품 위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비싸게 받을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을 선점해야 합니다.
지금의 메모리 슈퍼사이클도 사실 이런 전략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방향과 시대적 운이 맞아떨어져 현실이 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술보다 근본적인 병목은 사람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을 떠받치는 엔지니어 세대가 은퇴하는데, 뒤를 받칠 인구는 줄어든다.
골든타임이 좁다고 하셨는데, 기술 외에 어떤 문제가 가장 크다고 보십니까?
인력 문제입니다. 지금 한국 반도체 산업을 떠받치는 엔지니어 덩어리는 80년대 초중반 학번, 90년대 학번, 2000년대 학번들입니다. 이들이 빠르면 10년, 늦어도 20~25년 안에 은퇴합니다.
그 자리를 2010년대, 2020년대 학번들이 물려받아야 하는데, 이 세대의 인구는 훨씬 적습니다. 거의 반토막 수준입니다. 그런데 같은 기간 한국 반도체 산업은 용인 메가클러스터 같은 확장으로 지금의 두 배, 세 배까지 커질 수 있습니다.
인구는 줄고 산업 수요는 늘어납니다. 지금도 인력이 넉넉하지 않은데, 이 격차가 더 벌어집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20대 청년들만으로 반도체 인력을 채울 수 없습니다. 30대, 40대, 50대 커리어 전환자들도 반도체 엔지니어가 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일본처럼 은퇴 엔지니어들을 다시 현장에 불러오는 시대가 올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똑똑한 학생들이 이공계로 잘 안 간다는 점입니다. 대학원도 잘 안 가고, 의치한약수 쪽으로 많이 갑니다. 겉보기 실적은 좋은데, 그 아래 체력은 비실비실할 수 있습니다. 슈퍼사이클이 그 문제를 가려버리는 게 위험합니다.
가장 중요한 전략 파트다. 한국이 단순 공급자에서 벗어나려면, 메모리가 연산 구조의 일부를 정의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메모리는 늘 CPU나 GPU에 종속된 느낌이 있습니다. HBM도 결국 엔비디아 GPU와의 조합이 중요했습니다. 우리가 메모리로 세상을 주도한다는 게 잘 상상이 안 됩니다. 우리는 뭘 잘해야 합니까?
종속됐기 때문에 그동안 혜택을 누린 것도 사실입니다. 글로벌 표준이 하나였고, 우리는 거기에 잘 맞췄고, 가격 경쟁력과 케파를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상방이 느려지고, 글로벌 시장도 흔들리면서 그 어드밴티지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제는 비종속적인 것에 대해서도 한국이 시도할 때가 됐습니다. 물론 조심해야 합니다. 일본은 독자 기술과 장인정신은 있었지만 글로벌 방향과 맞지 않아 외면당했습니다. 한국도 독자 노선을 잘못 타면 큰 착오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때와 지금은 다릅니다. 상방은 느려지고, 미·중은 싸우고, 중국 시장은 분리될 가능성이 있고, 한국은 이제 앞에서 맞바람을 맞아야 하는 위치에 왔습니다. 맨 앞에 있으면 맞바람을 맞지만, 동시에 풍향계를 조절할 특권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논컨벤셔널이라고 부릅니다. 비전통적인 길입니다. 하나는 논일렉트론, 즉 전자 말고 광자나 스핀 같은 다른 물리 현상을 활용하는 방향입니다. 다만 이것들이 전자를 전부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일부 영역에서 더 뛰어날 수는 있지만 전체를 대체하긴 어렵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논폰노이만 아키텍처입니다. 지금까지는 연산 코어와 메모리가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코어는 계산하고, 메모리는 데이터를 저장했다가 보내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AI 추론에서는 GPU가 놀고 있습니다. 메모리가 병목입니다. HBM도 느리고, 용량 제한도 있습니다. KV 캐시가 넘치면 DRAM으로 밀려나고, 그러면 속도가 떨어집니다.
그래서 근원적인 질문이 나옵니다. “메모리가 일부 연산을 하면 안 되나?” 이게 PIM, PNM 같은 기술입니다. 메모리 안에서 처리하거나 메모리 근처에서 처리해 데이터 이동을 줄이는 방식입니다. 10년 전에는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약했지만, AI 시대에는 이게 남는 장사가 되는 변곡점이 왔습니다.
Processing-In-Memory. 메모리 안에서 일부 연산을 직접 처리해 데이터 이동을 줄이는 접근.
Processing-Near-Memory. 메모리 바로 근처에 연산 기능을 붙여 병목을 줄이는 접근.
HBM 아래쪽 로직 영역. 향후 메모리 병목을 푸는 연산·압축·정밀도 변환 기능이 들어갈 수 있는 후보.
고객별 AI 워크로드에 맞춰 메모리 구조와 기능을 커스터마이즈하는 전략적 위치.
메모리 업체가 병목을 해결하는 룰세터가 되면, 엔비디아의 통제력은 약해질 수 있다. 그래서 협력과 긴장 사이의 균형이 중요하다.
메모리 업체가 베이스다이에 기능을 넣고, 고객별로 커스터마이즈하는 쪽으로 가면 엔비디아가 싫어하지 않을까요?
싫어할 겁니다. 엔비디아는 중요한 병목 지점마다 자신들의 기술 스펙을 정의하고, 그것을 사실상 표준처럼 활용해왔습니다. 시장이 충분히 무르익으면 조금씩 열어주는 전략을 잘 취해왔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NVLink 같은 것들입니다.
엔비디아가 다음으로 노리는 건 HBM 베이스다이, GPU와 CPU 사이의 로직, DRAM과 HBM 사이의 SRAM 같은 영역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스펙으로 가길 원하고, 메모리 업체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랄 겁니다.
하지만 메모리 업체들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질서에 종속돼서 얻는 이익이 있는 반면, 메모리가 병목인 상황에서 더 큰 주도권을 가질 기회도 있습니다. 예전처럼 을의 입장이라면 이런 이야기가 먹히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메모리 업체들이 분기당 수십조씩 이익을 쌓는 상황입니다. 이 기회가 2년은 갈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 수 있습니다. 엔비디아와 협력은 유지하되, 구글·메타·아마존 같은 하이퍼스케일러와 더 깊게 붙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특히 자체 ASIC을 쓰려는 하이퍼스케일러들은 메모리 업체와 더 많은 스킨십을 원할 수 있습니다.
투자자 관점에서 가장 놓치기 쉬운 부분이다. 메모리 가격이 너무 올라 미국 빅테크를 압박하면, 미국 정부가 반독점·산업정책·안보 패키지로 개입할 수 있다.
만약 한국 메모리 업체들이 진짜 판의 주도권을 잡고 가격 결정력까지 가지면, 미국 정부가 가만히 있을까요?
많은 분들이 메모리 슈퍼사이클을 볼 때 불마켓, 베어마켓, 베이스마켓 세 가지 시나리오를 봅니다. 그런데 제4의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미국 정부 개입입니다.
미국 정부가 쓸 수 있는 수단은 여러 가지입니다. 가장 쉽게는 반독점법입니다. “왜 메모리 가격이 이렇게 올랐느냐. HBM은 1.5배 올랐다면서 왜 DRAM은 세 배, NAND는 네 배 올랐느냐”는 식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미국 IT 대기업들이 로비를 하면서 “한국 메모리 업체들이 1980년대 일본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미국 정부는 자국 산업 보호 논리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가격을 정상화하라고 하거나, 팹의 상당수를 미국에 옮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둘 다 싫다고 하면 반독점 이슈를 걸 수 있습니다.
이게 더 커지면 1980년대 미·일 반도체 협정 같은 안보와 연계된 종합 패키지로 갈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시나리오까지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메모리 업체들이 가격 결정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더 길게 봐야 합니다. 문턱값을 넘으면 안 됩니다. 스트레스 테스트를 너무 세게 하면 안 됩니다.
이 문제를 눈여겨보는 부처는 미 재무부와 미 산업부입니다. 향후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의제에 오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동맹인데 설마 그런 일이 있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1980년대 일본도 동맹이었습니다.
이 대담은 중국 공포론이 아니라, 한국 반도체가 지금의 슈퍼사이클을 다음 판의 주도권으로 바꿔야 한다는 전략적 경고에 가깝다.
이 인터뷰의 핵심은 단순히 “중국이 무섭다”가 아니다. 중국은 아직 EUV, 정밀기계, 고성능 메모리에서 선두권과 격차가 있다. 하지만 무서운 건 절대 수준이 아니라 속도와 방식이다.
중국은 막히면 우회하고, 실패하면 데이터를 쌓고, 내수에서 표준을 만들고, 규모의 경제를 태운 뒤 밖으로 밀어낸다. 전기차와 디스플레이에서 봤던 그 방식이 반도체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
한국은 지금 메모리 슈퍼사이클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이건 실력 100%가 아니라 AI 데이터센터 투자, 엔비디아 생태계, 메모리 병목, 시대적 운이 겹친 결과다. 그래서 이 돈을 단순히 즐기면 위험하다. 이 돈과 시간을 이용해 다음 판의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그 다음 판은 단순 HBM 납품이 아니다. PIM, PNM, 베이스다이, 메모리 중심 컴퓨팅, 하이퍼스케일러 맞춤형 메모리 아키텍처다. 한국 메모리 업체가 단순 공급자가 아니라 연산 인프라의 룰세터가 되는 길이다.
다만 이 길은 엔비디아와의 긴장, 미국 정부 개입, 중국의 추격, 국내 인력 부족이라는 리스크를 동시에 품고 있다. 그래서 결론은 간단하다. 한국 반도체는 아직 골든타임이다. 그런데 이 골든타임은 축배 들 시간이 아니라, 다음 룰을 만들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