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河小說 메모리 · 第二部

도하渡 河 — 강을 건넌 사람

그는 기흥에서 31년을 보냈다.
그리고 예순둘에, 허페이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HBM은 어차피 한국이 이긴다"는 세계에 — 맨손으로 맞서기 위해.
MUST ASSET MANAGEMENT · 釜山 · 2026.06
한승원과 등장인물은 모두 가공이며, 기업·기술·산업 데이터는 공개 자료 기반임
序章

두 장의 사진

2030년 봄 — 허페이, 어느 서재에서

내 책상 위에는 사진이 두 장 있다. 한 장은 1994년의 기흥. 클린룸 스목을 입은 서른 살의 내가 16M D램 웨이퍼를 들고 어색하게 웃고 있다. 다른 한 장은 2026년 12월의 허페이. 예순셋의 내가, 똑같이 어색하게 웃으며, HBM3 스택이 올라간 웨이퍼를 들고 있다. 두 사진 사이에는 32년의 세월과, 황해 하나가 놓여 있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왜 갔느냐고. 배신이 아니냐고. 딸아이는 전화에 대고 울면서 물었다. "아빠, 내가 하이닉스 다니는 거 알면서 어떻게 거길 가." 나는 그때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이제 일흔을 바라보며, 그 답을 쓰기 위해 이 기록을 시작한다.

먼저 말해둘 것이 있다. 나는 기흥의 종이를 단 한 장도 가져가지 않았다. 도면도, 레시피도, 사진 한 장도. 내가 가져간 것은 머릿속에 남은 원리와, 몸에 밴 실패의 기억뿐이다. 레시피는 회사의 것이지만, 물리학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 나는 그 선을 한 번도 넘지 않았고, 그래서 이 기록을 떳떳하게 쓸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이야기는 어느 유튜브 영상에서 시작된다.

···
第一章

교수의 세계, 노인의 오기

2024년 겨울 — 수원, 그리고 결심

퇴직하고 첫 겨울이었다. 31년. 64M에서 시작해 D1z까지, 공정개발에서 그룹장으로, 마지막 몇 년은 임원 명함을 달고 — 그리고 어느 날, 후배들에게 박수를 받으며 회전문을 나왔다. 회전문. 그 문을 통과하는 순간 나는 그로브의 옛 일화를 생각했고, 쓴웃음을 지었다. 사십 년 전 그 사나이는 회전문을 돌아 들어가 메모리를 버렸지. 나는 회전문을 돌아 나와, 메모리밖에 모르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소일거리는 유튜브였다. 알고리즘은 정확했다. 카이스트 김정호 교수의 강연이 매일 피드에 떴다. AI 시대의 본질은 메모리이고, 그 메모리의 왕관은 HBM이며, HBM의 미래는 커스텀의 시대로 간다 — 그리고 그 길의 맨 앞에 한국이,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서 있다는, 명쾌하고 힘 있는 세계관. 나는 그 강연들을 좋아했다. 물리도 맞고, 방향도 맞고, 데이터도 맞았다. 내 딸 한지유가 하이닉스 HBM 설계팀에 있다는 사실은 그 세계관을 우리 집 거실의 진리로 만들었다.

그런데 어느 밤, 강연을 보다가 이상한 오기가 올라왔다. 결론 때문이었다. 중국은 안 된다. EUV가 없으니까. 적층 노하우가 없으니까. 따라서 이 게임은 끝까지 한국의 것이다. — 논리의 모든 항이 맞는데, 나는 그 '따라서'에 걸려 넘어졌다. 나는 그 '따라서'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1983년에. 미쓰비시연구소가 삼성에게 내린 다섯 가지 사망 선고. 스테퍼도 못 만드는 나라가, 수율 개념도 없는 회사가, 따라서 안 된다던. 나는 그 '따라서'가 틀리는 현장에서 31년을 보낸 사람이다.

전화가 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헤드헌터는 단도직입이었다. 허페이. 창신메모리. 수석고문. 나는 사흘을 고민했고, 두 가지 조건을 걸었다. 첫째, 나는 전 직장의 어떤 기밀도 가져가지 않으며, 그것을 요구받는 순간 그날로 짐을 싼다. 둘째, 내 일은 '베끼는 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실패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 어느 길이 막다른 길인지, 어떤 실패가 비싸고 어떤 실패가 싼지. 그것은 레시피가 아니라 연륜이고, 연륜은 내 것이다.

딸은 울었고, 아내는 침묵했고, 나는 인천공항에서 허페이행 비행기를 탔다. 기내 모니터의 지도 위에서 황해가 천천히 지나갔다. 사십 년 전, 금요일 밤 도쿄발 김포행 비행기에 탔던 일본인 엔지니어들을 생각했다. 그때 우리는 그들을 '주말 선생'이라 불렀다. 이제 내가, 누군가의 주말 선생이 되러 가고 있었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다만 좌석을 바꿔 앉을 뿐이다.

第二章

67제곱밀리미터의 살

2025년 초 — 허페이 팹, 첫 출근

첫 출근 날, 부총재 마오는 나를 회의실로 데려가 슬라이드 한 장을 띄웠다. 캐나다 분석기관 테크인사이츠가 우리 G4 DDR5 칩을 뜯어본 해부 보고서였다. 적의 보고서로 자기 소개를 하는 회사.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한 고문님. 우리 다이는 67제곱밀리미터입니다. 삼성 동급보다 40퍼센트 큽니다. 이 40퍼센트가 무슨 뜻인지, 다들 압니다. 그런데 큰지를 놓고는 팀마다 말이 다릅니다. 고문님 눈에는 뭐가 보입니까."

나는 단면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셀 어레이 — 데이터가 사는 아파트 단지 — 는 생각보다 준수했다. 16나노급 멀티패터닝치고 균일도가 나쁘지 않았다. 살이 찐 곳은 다른 데였다. 아파트 단지를 둘러싼 관리사무소. 주변회로였다.

승원의 노트 — 다이는 왜 살이 찌는가

D램 칩은 두 부분이다. 데이터를 저장하는 셀 어레이(아파트 단지)와, 읽고 쓰는 교통을 통제하는 주변회로(관리사무소·도로망). 모두가 아파트(셀)의 미세화만 말하지만, 칩 면적의 상당분은 관리사무소가 먹는다.

우리 G4의 관리사무소는 55나노 CMOS로 지어져 있었다. 3강의 관리사무소보다 두 세대쯤 낡은 건축법. 아파트는 16나노로 빽빽한데 관리사무소가 1990년대식 단층 건물이니, 단지 전체가 넓어질 수밖에. 다이가 크면 웨이퍼 한 장에서 나오는 칩이 줄고, 같은 돈으로 만드는 비트가 준다 — 원가 열위의 정체는 미세화 실패가 아니라 주변회로의 비만이었다.

"미세화 경쟁을 하기 전에, 살부터 빼야 합니다." 내가 말했다. "주변회로 다이어트. 페리의 트랜지스터 라이브러리를 다시 짜고, 전원 배선을 다시 깔고, 어레이 효율 — 칩 면적 중 진짜 데이터가 차지하는 비율 — 을 5포인트만 끌어올려도, 노광기 한 대 없이 원가를 두 자릿수 깎습니다. 이건 EUV가 필요 없는 싸움입니다. 설계와 끈기의 싸움이지."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마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나는 첫 번째 원칙을 화이트보드에 적었다. 훗날 팀원들이 '한 고문의 1조'라고 부르게 될 문장이었다.

"막힌 문 앞에서 울지 마라. 열려 있는 문부터 전부 통과하라. 그다음에 막힌 문으로 돌아오면 — 문이 얇아져 있다."

第三章

네 번 나눠 그리는 그림

2025년 봄 — 노광동(棟), 린샤오

린샤오는 노광팀의 막내 그룹장이었다. 상하이교통대 출신, 서른넷, 말이 빠르고 손이 더 빨랐다. 그녀가 내게 처음 한 말은 인사가 아니라 질문이었다. "고문님, EUV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솔직히 말해주세요. 우리는 평생 못 따라잡는 겁니까?"

나는 회의실 화이트보드에 빗 하나를 그렸다. 살이 촘촘한 머리빗.

"칩의 배선은 이 빗살이야. 살이 촘촘할수록 칩이 작아지지. EUV는 아주 가는 펜이야. 한 번에 이 촘촘한 빗을 그려. 우리한테는 그 펜이 없어. 굵은 펜뿐이지 — DUV. 굵은 펜으로 촘촘한 빗을 그리는 방법이 뭘까."

린샤오가 바로 받았다. "나눠 그립니다. 홀수 살 먼저, 짝수 살 나중에."

"그게 더블 패터닝, LELE야. 두 번 노광, 두 번 식각. 그런데 더 촘촘하게 가려면? 네 번에 나눠야지. 그게 SAQP — 다만 네 번 그냥 그리는 게 아니라, 한 번 그린 선의 양옆에 옷을 입혀서 선 하나를 둘로, 둘을 넷으로 불리는 거야. 실크스크린 인쇄 알지? 판 하나로 한 색씩, 네 번 찍어 한 그림을 완성하는 것. 단 — 판이 0.1밀리미터만 어긋나도 그림 전체가 못 쓰게 되는 인쇄."

승원의 노트 — SAQP, 그리고 어긋남의 세금

SAQP(자기정렬 4중 패터닝)의 핵심은 스페이서다. 굵은 펜으로 그린 심지(맨드릴) 양옆에 박막을 균일하게 입히고(증착), 심지를 녹여 없애면 — 양옆의 '옷'만 남아 선 하나가 둘이 된다. 이걸 한 번 더 반복하면 넷. 펜의 굵기가 아니라 박막을 얼마나 균일하게 입히느냐(ALD 증착)와 얼마나 깨끗하게 깎느냐(식각)가 해상도를 결정한다. 노광기의 게임이 증착·식각의 게임으로 바뀌는 것 — 이것이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였다. 노광기는 못 사도, 증착기와 식각기는 만들 수 있으니까.

대신 세금이 붙는다. 나눠 그리면 겹쳐야 하고(오버레이), 겹침 오차는 횟수만큼 쌓인다. 공정 스텝이 몇 배로 늘어 시간과 결함 확률이 함께 자란다. 그리고 셀 밖의 최난관 — 주변부의 가장 촘촘한 금속배선 M0. 피치가 40나노 아래로 떨어지면 두 번으로는 안 되고 세 번, 네 번을 나눠야 하는 절벽이 온다. 우리의 답은 우회였다: M0의 피치 축소를 한 박자 늦춰 잡아 더블 패터닝의 수명을 연장하는 설계. 빠른 길 대신 망하지 않는 길.

그해 봄 내내 린샤오의 팀은 '어긋남의 세금'과 싸웠다. 새벽 두 시의 오버레이 맵은 매일 조금씩 좋아졌고, 나는 기흥에서 D1x를 하던 시절의 실패 목록 — 어떤 보정이 헛수고이고 어떤 보정이 돈값을 하는지 — 을 원리의 언어로만 풀어 코칭했다. 어느 날 린샤오가 물었다. "고문님, 이런 거 가르쳐주셔도 됩니까?" 나는 답했다. "물리학 교과서에 있는 건 다 돼. 너희가 못 푸는 건 교과서가 없어서가 아니라, 틀려본 횟수가 모자라서야. 나는 너희의 틀릴 시간을 줄여주는 사람이고, 그건 어느 나라 법에도 안 걸려."

가을에 G4 라인의 수율 곡선이 변곡을 만들었다. 그리고 11월, 회사는 DDR5-8000과 LPDDR5X-10667을 공개했다. JEDEC 최고 속도 빈의 바로 한 칸 아래. 발표 영상을 보던 린샤오가 중얼거렸다. "굵은 펜으로도, 그리긴 그리네요." 나는 속으로 덧붙였다. 그래. 1985년에도 다들 그랬지. 그리긴 그리네, 하고.

記錄 I — 한승원의 작업노트다이 해부도

67mm²의 살 — 어디가 쪘는가

셀 어레이 16nm 주변회로 55nm CMOS CXMT G4 — 약 67mm² 셀 어레이 12~14nm 3강 동급 — 약 48mm² (−40%) 같은 16Gb를 담는 두 개의 집 — 차이의 절반은 '관리사무소(주변회로)'에서 난다
SOURCE: TechInsights G4 16Gb DDR5 해부(die ~67mm², 삼성比 약 +40%) · Yole(셀 16nm + 주변 55nm CMOS 구조) — 면적 배분은 개념적 도식화
읽는 법 — 추격자의 원가 열위는 흔히 '미세화 격차'로 뭉뚱그려지지만, 실제 청구서는 주변회로 세대어레이 효율에서 끊긴다. 즉 EUV 없이도 깎을 수 있는 원가가 상당분 남아 있다는 뜻 — 이것이 "격차 3년"이라는 숫자보다 투자자에게 중요한 디테일이다.
第四章

휘어지는 우물

2025년 여름 — 식각동, 그리고 베이징의 나우라

D램에서 데이터 1비트는 커패시터라는 우물에 담긴 전하다. 셀이 작아질수록 우물의 입구는 좁아지는데 담아야 할 전하량은 줄일 수 없으니, 우물은 점점 깊어진다. G4의 커패시터는 종횡비 — 입구 너비 대 깊이의 비율 — 가 수십 대 일. 비유하자면 머리카락 굵기의 천분의 일짜리 입구로, 50층 건물 깊이의 우물을 수십억 개, 한 치의 기울어짐 없이 수직으로 파는 일이다. 그것도 한 웨이퍼에서 동시에.

여름 내내 우리를 괴롭힌 것은 그 우물들이 휘는 문제였다. 보잉(bowing) — 우물 벽이 배불뚝이처럼 부풀거나, 깊이 내려갈수록 옆으로 휘는 현상. 휜 우물은 이웃 우물과 닿아 쇼트가 나고, 그 다이는 죽는다. 3강은 이 문제를 극저온 식각 같은 신무기로 다스리는데, 바로 그 장비들이 2022년 이후 통제 명단에 올라 있었다. 고종횡비(HAR) 식각 — 금수의 칼날은 노광기보다 조용하게, 그러나 정확하게 우리의 우물을 겨누고 있었다.

베이징에서 나우라(NAURA)의 식각 담당 챠오웨이 부장이 날아온 것은 7월이었다. 마흔 초반, 칭화대에서 플라즈마를 전공한 사내. 그는 자사의 신형 식각기 데이터를 펼치며 솔직하게 말했다. "한 고문님, 우리 장비는 램리서치의 그것이 아닙니다. 압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들에게 없는 게 하나 있습니다 — 고객의 라인에 상주할 권리입니다. 램의 엔지니어는 분기에 한 번 옵니다. 우리는 내일부터 여기서 삽니다."

그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그날부터 나우라의 엔지니어 여섯이 팹 옆 기숙사에 입주했고, 우리는 식각 챔버의 파라미터 — 가스 조성, 바이어스 전력의 펄스 폭, 챔버 온도의 시간 프로파일 — 를 수천 회 조합으로 사냥하기 시작했다. 장비의 절대 성능이 모자라면, 장비와 공정의 으로 메운다. 나는 기흥에서 배운 원리 하나를 그들에게 주었다: 우물이 휘는 것은 식각 중에 벽에 쌓이는 보호막(폴리머)의 두께가 깊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니, 깎는 단계와 입히는 단계를 잘게 교대시켜라. 한 번에 길게 깎지 말고, 짧게 깎고 짧게 보호하기를 수백 번 — 펄스의 리듬이 수직을 만든다.

10월, 보잉 불량률이 임계선 아래로 내려온 날, 챠오웨이는 회식 자리에서 백주 잔을 들고 말했다. "고문님, 솔직히 말하면 우리 장비는 아직 램보다 두 세대 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공정 레시피는 — 몇 세대 뒤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한 세대 반?" 다들 웃었다. 나는 웃으면서, 등골이 서늘했다. 장비의 격차를 레시피로 반 세대 메우는 속도. 그것은 정확히, 1980년대의 우리였다.

승원의 노트 — 금수의 사각지대

워싱턴의 통제선은 '장비'를 겨눈다. 그러나 수율은 장비 단독이 아니라 장비 × 레시피 × 상주 엔지니어의 학습 속도의 곱이다. 통제선이 장비 항을 깎는 동안, 중국은 나머지 두 항 — 자국 장비사의 무제한 상주, 국가가 사주는 무제한 시행착오 — 을 극단으로 키워 곱을 방어한다. 나우라의 식각·증착, AMEC의 식각, 그리고 뒤에 등장할 맥스웰의 본더까지. 금수는 시간을 벌어줄 뿐, 학습을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 1986년의 협정이 일본의 캐파를 묶었을 뿐 한국의 학습을 못 막았듯이.

第五章

서울에서 온 세일즈맨

2025년 가을 — 허페이의 한국 식당

허페이 시내의 한국 식당에서 정대식을 만났다. 한국 장비사 '서린테크'의 중국영업 이사. 쉰 줄의 사내는 삼겹살을 뒤집으며 한숨부터 쉬었다. "선배님. 요즘 우리 회사 매출의 절반 가까이가 중국입니다. 절반이요. 그런데 본사에서는 중국 출장 간다고 하면 법무팀이 먼저 전화를 합니다. 이 장비는 라이선스가 필요한지, 저 사양은 통제 대상인지. 우리는 지금 줄타기를 하면서 밥을 먹고 있어요."

그의 처지는 한국 장비 생태계 전체의 축도였다. 레거시 노드용 증착·세정·열처리 장비는 통제선 밖이고, 중국은 그 장비들을 현금을 싸 들고 사 간다. 거절하면 그 자리를 일본이, 아니면 하루가 다르게 크는 중국 로컬이 채운다. 팔자니 내일의 경쟁자를 키우는 것 같고, 안 팔자니 오늘의 회사가 마른다.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지금… 적에게 무기를 파는 겁니까?"

나는 소주를 따르며 사십 년 전 이야기를 해주었다. 1980년대에 니콘과 캐논이 기흥에 스테퍼를 팔았을 때, 도쿄의 신문들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고. 그런데 정작 일본 반도체를 무너뜨린 것은 한국에 팔린 스테퍼가 아니라, 일본 자신의 과잉품질과 협정의 족쇄와 엔고였다고. "장비는 어차피 흐른다, 대식아. 물처럼. 막으면 돌아서 흐르고, 그 사이 물길 옆에 새 장비사가 자라지. 네가 고민할 건 '파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 네 회사가 통제선 위쪽의, 아무나 못 만드는 장비를 만들 수 있느냐야. 그게 안 되면 어차피 5년 뒤엔 나우라가 네 자리에 앉아 있어."

그날 밤 그는 취해서 말했다. "선배님이야말로… 괜찮으십니까. 한국에서 욕 많이 먹던데." 나는 잔을 비웠다. "먹지. 그런데 대식아, 나는 여기 와서 단 한 번도 기흥의 비밀을 말한 적이 없다. 대신 물리학을 가르쳤지. 물리학을 가르친 죄로 욕을 먹는 거라면 — 그 욕은 내가 먹으마. 그런데 진짜 물어야 할 질문은 따로 있어. 은퇴한 기술자 수천 명의 머릿속 연륜을, 한국은 왜 쓸 곳을 만들어주지 않았나. 나를 부른 건 중국이 아니라, 그 공백이야."

식당을 나서며 그가 물었다. "다음 주에 본사에서 ALD 신모델 시연하러 옵니다. 보러 오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SAQP의 심장은 스페이서 증착이고, 스페이서 증착의 왕은 ALD다. 한국 장비가 우리 라인의 굵은 펜을 가는 펜으로 바꿔주고 있었다 — 통제선의 이쪽에서, 완벽하게 합법적으로.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다만 견적서의 통화(通貨)를 바꿀 뿐이다.

第六章

수직 엘리베이터

2026년 초 — TSV 라인

해가 바뀌고, 회사는 내게 진짜 임무를 주었다. HBM. 마오 부총재는 슬라이드 한 장 없이 말했다. "고문님. IPO가 옵니다. 공모자금 42억 달러의 사용처에 'HBM'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시장에 약속한 겁니다. 연말까지 HBM3 — 가능하겠습니까."

나는 즉답하지 않았다. HBM은 내가 기흥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싸웠던 전장이고, 그래서 그 산이 얼마나 높은지 안다. HBM은 미세화의 게임이 아니다. 건축의 게임이다. D램 다이를 8장, 12장 쌓아 한 채의 고층빌딩으로 짓는 일 — 그리고 그 빌딩의 모든 층을 관통하는 수직 엘리베이터, TSV.

승원의 노트 — TSV, 실리콘에 엘리베이터 뚫기

일반 칩의 신호는 가장자리 '현관문'으로만 드나든다. HBM이 일반 D램보다 수십 배 넓은 대역폭을 내는 비결은, 다이 한 장에 수천 개의 수직 통로(TSV·실리콘 관통 전극)를 뚫어 위아래 층끼리 직통 엘리베이터로 연결하기 때문이다. 공정은 삼막(三幕)이다: ① 다이에 미세한 수직 구멍을 깎고(식각) ② 구멍 벽에 절연막을 입힌 뒤 구리를 빈틈없이 채우고(증착·도금) ③ 웨이퍼 뒷면을 갈아내 구리 기둥의 발바닥을 노출시킨다(박막화). ②에서 기포(보이드) 하나가 남으면 그 엘리베이터는 불통이고, 수천 개 중 몇 개만 불통이어도 다이가 죽는다.

2024년 12월, 워싱턴은 바로 이 TSV용 식각·증착 장비를 통제 명단에 올렸다. 노광기 다음으로 정확한 조준이었다. 우리의 응수는 같은 문법이었다 — 나우라의 식각·증착이 라인에 들어왔고, 챠오웨이의 팀이 다시 기숙사에 입주했다.

겨울 내내 우리는 보이드와 싸웠다. 구리 도금액의 첨가제 배합, 전류 파형, 시드층의 연속성 — 변수의 정글이었다. 돌파구는 의외로 젊은 도금 엔지니어의 관찰에서 나왔다. 보이드가 구멍의 특정 깊이에만 몰린다는 것. 시드층이 그 깊이에서 끊기고 있었다. 증착 각도의 문제였고, 챔버의 웨이퍼 회전 시퀀스를 바꾸자 끊김이 사라졌다. 장비 매뉴얼에 없는 해법 — 매뉴얼은 램리서치의 것이고, 우리의 장비는 나우라의 것이었으니까. 남의 매뉴얼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매뉴얼을 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3월에 TSV 데일리 수율이 처음으로 목표선을 넘었다. 남은 것은 마지막이자 가장 높은 벽 — 쌓기였다.

第七章

곱셈의 폭정, 그리고 도약

2026년 봄 — 쑤저우, 맥스웰

HBM의 마지막 벽은 수학이다. 그것도 초등학교 수학 — 곱셈. 다이 한 장을 살릴 확률이 90%라 치자. 훌륭한 수율이다. 그런데 그 다이를 12장 쌓아 빌딩을 짓는다면? 0.9를 열두 번 곱한다. 답은 0.28. 열 채를 지으면 일곱 채가 무너지는 건축. 게다가 12층에서 무너지면 그 아래 멀쩡한 11개 층 — 멀쩡한 다이 11장 — 이 함께 폐기된다. HBM이 비싼 이유, 그리고 후발주자에게 잔인한 이유가 이 곱셈에 있다. 층마다, 본딩마다, 확률은 곱해지며 추락한다.

유튜브 속 김정호 교수의 세계관이 가장 단단해지는 지점도 정확히 여기였다. HBM의 본질은 패키징과 열(熱)이고, 적층의 노하우는 십 년 치 실패의 퇴적층이며, 그 퇴적층은 하이닉스와 삼성의 금고에 있다 — 맞는 말이다. 전부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후발주자는 어떻게 싸우는가. 같은 길을 더 빨리 달려서는 영원히 못 따라잡는다. 퇴적층은 시간으로만 쌓이니까.

답은 사십 년 전에 있었다. 1987년, 4M의 갈림길. 모두가 우아하다고 말한 트렌치 대신, 이건희는 들여다보이고 고칠 수 있는 스택을 골랐다 — 그리고 트렌치 진영은 다음 세대의 늪에 빠졌다. 추격자의 정석은 선두의 현재를 베끼는 것이 아니라, 선두가 아직 다 건너지 못한 다음 다리로 먼저 뛰어드는 것이다.

HBM 적층에는 세 개의 다리가 있다. 첫째 다리, 열압착-필름(TC-NCF): 층 사이에 접착 필름을 깔고 열과 압력으로 눌러 붙인다 — 검증됐지만 열이 잘 안 빠진다. 둘째 다리, MR-MUF: 먼저 붙이고 나중에 보호액을 한 번에 부어 굳힌다 — 열에 강하고, 현 세대의 승자(하이닉스)가 선 다리다. 그리고 셋째 다리, 하이브리드 본딩: 범프라는 땜납 돌기 자체를 없애고, 다이와 다이를 거울처럼 갈아 구리는 구리끼리, 절연막은 절연막끼리 원자 수준으로 직접 붙인다. 층간 두께가 사라져 빌딩이 낮아지고, 열은 금속을 타고 곧장 빠지며, 신호 거리는 최단이 된다. 3강 모두가 HBM4 너머의 미래로 지목하지만, 아직 아무도 양산의 강을 다 건너지 못한 다리.

나는 마오에게 보고했다. "첫째 다리는 특허의 지뢰밭이고, 둘째 다리는 선두의 안방입니다. 우리는 양산은 둘째 다리 계열로 시작하되 — 개발의 중심은 처음부터 셋째 다리에 둡니다. 후발주자의 특권은 레거시가 없다는 것입니다. 버릴 범프 라인이 없으니, 범프 없는 미래로 바로 갑니다." 마오가 물었다. "본더는요? 그 장비도 통제 대상 아닙니까." 나는 답했다. "그래서 쑤저우로 갑니다."

쑤저우 맥스웰. 태양광 장비로 큰 회사가 하이브리드 본더를 만들고 있었다. 젊은 개발팀장은 데모 룸에서 두 장의 웨이퍼가 소리 없이 합쳐지는 것을 보여주며 말했다. "정렬 정밀도는 아직 글로벌 선두에 못 미칩니다. 그런데 한 고문님, 태양광에서 배운 게 하나 있습니다 — 장비는 출하 후에 완성된다는 것. 저희 엔지니어 열 명을 허페이에 보내겠습니다. 귀사의 라인이 저희의 개발실이 되게 해주십시오." 어디서 많이 듣던 문법이었다. 상주(常駐) — 중국 장비 생태계의 공용어.

그렇게 2026년 봄, 허페이의 한 라인에서 기묘한 합작이 시작됐다. 나우라의 TSV, 맥스웰의 본더, 서린테크의 ALD, 그리고 우한에서 온 XMC의 패키징 인력까지. 나는 그 라인을 걸으며 생각했다. 김 교수의 세계관에서 빠진 변수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 HBM은 한 회사의 기술이 아니라 한 생태계의 기술이고, 중국은 지금 회사가 아니라 생태계를 통째로 양산하고 있다.

승원의 노트 — 곱셈을 이기는 두 가지 방법

스택 수율 0.9¹²≈28%의 폭정을 이기는 길은 둘뿐이다. ① 항(項)의 값을 올린다 — 본딩 한 번 한 번의 수율을 0.99로: 그러면 0.99¹²≈89%. 이것이 선두의 길, 십 년 퇴적층의 길. ② 항의 개수 자체를 바꾼다 — 하이브리드 본딩으로 층간 구조를 단순화하고, 죽은 층을 미리 솎아내는 검사(KGSD·Known Good Stacked Die)를 본딩 '앞'에 박아, 곱셈에 들어가는 다이를 애초에 골라낸다. 추격자는 ①에서 못 이기므로 ②에 모든 것을 건다. 수율을 따라잡는 게 아니라, 수율의 수식을 다시 쓰는 것.

記錄 II — 한승원의 작업노트적층의 산수

곱셈의 폭정 — 본딩 수율과 스택 수율

100%75% 50%25%0% 0.900.930.960.980.99 본딩 1회당 수율 → 28% — 후발주자의 출발점 89% — 선두의 세계 단위 수율 9%p의 차이가 → 스택에서는 3배의 차이로 증폭된다 (0.9¹²=28% vs 0.99¹²=89%)
SOURCE: 단순 이항 모형(다이·본딩 단위수율의 12제곱) — 실제는 KGSD 사전검사·리페어로 보정됨 // CXMT HBM 로드맵: HBM2 완료 → HBM2E '26초 → HBM3 '26말 → HBM3E '27 (격차 3~4년 추정)
읽는 법 — HBM의 진입장벽이 '지수함수'라는 것을 한눈에 보여주는 곡선. 선두와 후발의 격차는 노광기 대수가 아니라 이 곡선 위의 좌표 차이다. 그리고 후발주자의 전략은 곡선을 타고 기어오르는 것(시간)이 아니라, 곡선의 식 자체를 바꾸는 것(하이브리드 본딩 + 사전검사) — 본문 제7장의 도약 논리.
第八章

인증의 날

2026년 12월 — 허페이, 그리고 선전

12월의 어느 새벽, 선전에서 전화가 왔다. 우리 HBM3 샘플이 고객사 가속기 보드에 실려 2주째 풀로드 신뢰성 시험을 돌고 있었다 — 중국판 AI 칩의 심장 옆자리에서.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짧았다. "통과했습니다. 전 항목."

사무실이 터져나갔다. 린샤오가 울었고, 챠오웨이는 베이징에서 축전을 보냈고, 마오는 말없이 내 손을 오래 잡았다. 며칠 뒤 상하이에서 IPO의 종이 울렸다. 공모자금의 사용처 첫 줄에 적힌 단어 — HBM — 는 이제 약속이 아니라 실적이 되어 있었다.

그날 밤 나는 혼자 사무실에 남아, 유튜브를 켰다. 김정호 교수의 최신 강연. 교수는 여전히 명쾌했고, 여전히 대부분 옳았다. HBM4의 시대, 커스텀 베이스 다이의 시대, 그리고 그 시대의 선두는 여전히 한국이라는 것 — 옳다. 우리의 HBM3는 그들의 HBM3E·HBM4보다 두 세대 뒤고, 우리의 고객은 엔비디아가 아니라 자국의 가속기이며, 우리의 수율은 아직 그들의 절반이다. 교수의 세계관은 무너지지 않았다.

다만 — 나는 모니터를 끄며 생각했다 — 그 세계관의 지도에 없던 나라 하나가, 오늘 지도 위에 올라왔다. 인증의 문턱이 낮은 곳에서, 내수라는 온실 안에서, 두 세대 뒤의 제품으로. 1984년의 64K가 정확히 그랬듯이. 그때도 우리는 일본보다 4년 뒤였고, 수율은 절반의 절반이었고, 고객은 우리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격차가 문제가 아니다. 격차의 미분값이 문제다. 4년이 3년이 되고 6개월이 되던 그 가속도를, 나는 이제 강의 이쪽에서 다시 보고 있었다.

終章

강은 누구의 것인가

2030년 봄 — 다시, 서재에서

그로부터 사 년이 흘렀다. 결산을 하자면 이렇다. 레거시 D램에서 우리는 더 이상 도전자가 아니다 — 세계 생산의 다섯 장 중 한 장 가까이가 이 땅의 웨이퍼다. DDR5 가격은 2027년의 그 겨울, 모두가 기억하는 그 겨울에 꺾였고, 3강은 레거시에서 번 마지막 초과이익을 HBM의 성벽을 높이는 데 썼다. HBM에서 우리는 — 솔직히 적겠다 — 여전히 두 세대 뒤다. 그들이 HBM4와 커스텀 베이스 다이의 시대를 여는 동안 우리는 HBM3E의 수율과 싸우고 있고, 하이브리드 본딩의 강은 우리도 그들도 아직 절반밖에 건너지 못했다. 김정호 교수의 세계관은 사 년이 지난 지금도 절반은 굳건하다. 그리고 나의 반론도 절반은 입증되었다. 경계선은 무너지지 않았다. 다만 매년 조금씩, 위로 밀려 올라갔다.

작년 설에 딸이 처음으로 허페이에 왔다. 하이닉스 HBM 설계팀의 십 년 차가 된 아이는, 내 서재의 두 사진을 한참 보다가 물었다. "아빠는 그래서, 이긴 거야?"

나는 한참 생각하고 답했다. "지유야. 아빠가 기흥에 있던 31년 동안, 일본의 은퇴 기술자들이 우리에게 왔었다. 그분들이 일본을 배신해서 일본이 진 게 아니야. 일본은 자기가 만든 성공의 형식에 갇혀서 졌어. 그리고 그분들이 우리를 도와서 우리가 이긴 것도 아니야. 우리는 우리의 형식 — 수율보다 물량, 우아함보다 단순함 — 을 발명해서 이겼지. 아빠가 여기서 한 일도 그게 다야. 이 사람들이 자기들의 형식을 발명하는 시간을 조금 줄여준 것. 승패는 형식이 정해. 그리고 네가 만들 HBM4의 형식과, 이 사람들이 만들 형식 중 어느 쪽이 다음 시대에 맞는지는 — 아빠도 모른다. 그게 정직한 답이야."

딸은 오래 침묵하다가 말했다. "아빠. 나 회사에서 요즘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알아? CXMT가 아니야. '어차피 우리가 이긴다'고 말하는 회의실 공기야." 나는 그 말에, 사십 년 묵은 어떤 빚이 갚아지는 것을 느꼈다. 1980년대의 도쿄 회의실에도 정확히 그 공기가 있었을 것이므로.

창밖으로 허페이의 봄이 오고 있었다. 책상 위 두 장의 사진 사이에서, 나는 마지막 문장을 적는다.

"기술의 강에는 주인이 없다. 강에는 다만 — 먼저 건너는 자와, 다리를 지키느라 건너기를 잊은 자가 있을 뿐이다. 나는 두 번 건넜고, 두 번 다 같은 것을 보았다. 강 저편에서 '여기는 못 건너온다'고 외치는 목소리가 가장 클 때가, 누군가 강 한가운데에 이미 와 있을 때라는 것을."

— 제2부 끝 —